곽동협 운경의료재단 곽병원 원장(출처 : 영남일보, 2021년 2월 5일자)
2021년도 달력을 보면 다음 주 2월12일이 설날로 표기되어 있다. 올해는 시절이 하 수상하여 가족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이기는 부담스럽겠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덕담을 전화나 문자로 주고받고 있다. 해가 바뀐 지 한 달 이상 지난 이 시점에서 또다시 뚱딴지같은 새해 인사를 건네고 있는 것이다.
설은 새해의 첫머리이며, 설날은 새해의 첫날이다. 해가 바뀌면 복된 한 해가 되기를 비는 마음에서 무엇보다 먼저 돌아가신 조상님께 예를 올리는 차례를 지내고 난 다음 연세가 많은 순서대로 어른들께 세배를 드린다. 그런 연후에 직장에서 혹은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는 시무식이나 신년교례회를 하는 것이 순서에 맞을 것이다. 그런데 일상생활을 양력으로 하다 보니 우리는 양력 1월1일 새해에 조상님께 인사를 드리지도 않은 채 직장동료나 친구들과 "신축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하례를 하고 덕담을 주고받고 있다. 이는 순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의 전통 관습에 비추어 보면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음력설을 쇠는 사람들에게 음력설 이전까지는 '2020년 경자년'이지 '2021년 신축년'이 아닌 것이다. 이 기간 "나이가 몇 살이냐"는 질문에 "설을 쇠면 몇 살이다"라는 어정쩡한 답을 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다. 송년회나 신년회를 음력으로 하는 단체를 본 적이 있는가. 오늘이 음력 며칠인지는 사주명리학을 공부하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모르는 실정이다. 그런데 유독 '설'만은 음력으로 되돌아가는, 시대에 역행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과거 일제강점기 민간에서 지켜 내려오던 관습화된 설을 말살하고자 일제는 음력설을 앞두고 떡방앗간을 못 돌리게 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하였다. 광복 후 일제에 대한 반감으로 양력설은 일본설이라 하여 배척당하다가 박정희 대통령 때 가정의례준칙의 하나로 음력설은 '민속의 날'이라 명명돼 공식적으로 양력설을 쇠게 했다. 언론에서 '군사정권 때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던 우리 고유의 설을 다시 찾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음력설이 오래된 우리의 큰 명절임은 분명하지만 역사적으로 따지면 중국설이라 볼 수 있으며 일상생활을 양력으로 하고 있고 모든 컴퓨터가 양력을 기준으로 돌아가는 '21세기 디지털시대의 설'로도 음력설은 부적합해 보인다. 양력설은 일본설인 줄 아는 분들이 많으나 대부분의 서양문물이 그러하듯 서양식 역법이 일본을 거쳐서 들어온 것뿐이다. 이 문제는 다수가 하는 대로 생각 없이 따라가서는 안 되고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해야 한다. 비록 소수이지만 양력설을 쇠고 있는 문중도 있다. 시인 조지훈의 생가가 있는 영양 한양 조씨 집성촌인 주실 마을이 대표적이다. 1900년대 초 실학사상을 수학한 조상들이 신문물을 받아들여 양력 1월1일을 새해 첫날로 본 이래 1928년 무렵부터 93년째 양력설을 쇠고 있다고 한다.
한 해의 시작을 의미하는 설은 헌 달력이 새 달력으로 바뀌듯 생활의 기초이며 시일표준을 정하는 잣대이자 기본이므로 해가 바뀌는 기준인 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누구도 설을 양력이나 음력으로 강요할 수는 없고 이 문제는 개개인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앞으로 코로나19가 종식되어 가족 친척들이 다시 한데 모여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할 수 있는 시기가 빨리 오기를 학수고대하면서 그때는 온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받아들인 양력설을 쇠고, 음력설에는 여유 있게 연휴를 즐기는 것이 현명하리라 생각한다. 곽동협 운경의료재단 곽병원 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