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영남일보. 2021년 3월 12일자.)
신천둔치를 산책하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에 커다란 물고기들이 떼 지어 노니는 모습을 보며 오래전 신천이 폐수가 흐르는 '죽음의 하천'이었던 필자의 어린 시절, 학교에서 들었던 당시로서는 충격적이었던 몇몇 이야기가 문득 뇌리를 스쳤다.
영국에서는 한밤중이나 새벽 인적이 없는 도로에서도 교통 신호를 철저히 지킨다는 이야기. 당시 교통안전에 대한 인식이 미흡했던 우리나라 운전자들에게는 믿기 힘든 저세상 얘기였다. 법을 지키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던 때였으므로 교통경찰이 보이지 않으면 교통법규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쩍 지나갔다. 그런데 요즘 자세히 관찰해보면 신호위반을 하는 운전자를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정지선 또한 잘 지키는 모습이다.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경적 소리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고 주차할 때도 옆의 차를 배려해 벽면이나 기둥에 바짝 붙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에서는 시위대를 경찰이 잡아가지 않고 오히려 다칠까봐 따라다니며 보호한다는 이야기. 필자의 학창시절, 시위대는 돌과 각목, 화염병으로 무장했고 경찰은 최루탄과 경찰봉으로 진압했다. 주동자들을 취조할 때 폭력과 고문은 일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시위가 민주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은 시위의 메카인 광화문광장에 10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도 물리적 충돌 없이 시위가 종료된다. 가히 세계 최고의 시위문화가 정착됐다. 반면 최근 미의회 습격사건은 미국 민주주의의 전당이 피로 물든 시위였으며 코로나 규제 철폐를 요구하는 유럽 여러 선진국에서의 시위도 우리의 시위에 비하면 폭력적이다.
한국전쟁 때 외국인들 사이에 '한국의 개는 짖지 않는다'는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견주도 도둑이고 도처에 도둑이 많아서 항상 소지품을 주의해야 한다는 뜻에서 나왔다. 그런데 최근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카페 테이블 위에 노트북컴퓨터나 휴대폰을 두고 화장실을 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다고 한다. 10여 년 전 일본인과 동행하면서 검표 없이 입장하는 KTX역 개찰구에 감탄하는 것을 직접 본 적도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휴대폰이나 지갑을 손에 들고 다니는 것조차 위험하다는 데 비하면 우리의 치안과 시민의식은 이미 세계 최고다.
한강의 기적으로 일컫는 급속한 경제성장에 비해 국민의식 수준이 따라가지 못해 외국인들로부터 '어글리 코리안'이라 비하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시민의식도 선진국 수준으로 성장했다. 필자는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지켜보면서 우리의 시민의식이 선진국 못지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능가하고 있다는 것을 순간순간 실감한다. 효율적인 의료시스템, KTX·지하철 등 편리한 대중교통수단, 어디서든 접속되는 와이파이, 편리한 배달 서비스, 언제 어디서나 생필품 구매나 쇼핑이 가능한 편의점이나 백화점 등 사회 인프라도 전 세계인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인구밀집지역에서의 치열한 경쟁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속담처럼 우리 스스로가 가진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희망이 없어 떠나고픈 나라, '헬조선'이라 비하하는 동안 사실은 국민 스스로의 힘으로 선진 국민조차 부러워하는 '헤븐조선'을 만들어가고 있다.
수달이 서식하는 생명의 하천으로 환골탈태한 대구 신천을 바라보며 이제 우리 정치지도자들이 소모적인 정쟁을 멈추고 눈앞의 표심보다는 먼 훗날을 바라보며 올바른 방향으로 국정을 이끌어주기만 한다면 국민들은 진정한 '헤븐코리아'를 만들어 후대에 물려줄 역량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곽동협 운경의료재단 곽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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