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배사 '9988234(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이틀 앓고 3일째 죽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란 뜻)'는 다수인의 공통된 바람이지만 영생을 추구하던 역사 속 절대 권력자들조차도 죽음 앞에서는 특권을 누리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의대교육, 의학서적 등을 통해 질병에 대해서는 공부했지만 의사가 해결해야 할 커다란 과제 중 하나인 죽음의 본질에 대해서는 정작 배운 바 없다. 내과의사로서 경험한 운명하신 분들의 소견과 나 자신이 직접 경험한 근사(近死)체험(near-death experience)을 토대로 죽음에 대한 고찰을 정리해 본다. 한국인의 사망원인 1위는 암이다. 암 환자는 말기가 되면 대부분 극심한 통증에 시달린다.
여기에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 아쉬움이 남는 삶, 남겨진 가족들에 대한 걱정이 휘몰아치면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날로 더해간다. 그런데 조물주의 배려 때문인지 정작 임종을 앞둔 환자의 표정은 의외로 편안해 보인다. 의학적으로는 혈압과 산소가 떨어져 고통을 느끼는 뇌 중추 활동이 중지되어서일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흔히 보는 마지막 유언은 이 시점에서는 불가능하다. 이 순간 혈압상승제, 인공호흡 등으로 회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다시 통증을 호소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있음'은 심장 박동이 뛰는 것이지만 정작 본인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곳은 '뇌'이다. 누구나 피해가고 싶어 하는 치매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가족들은 힘들지만 정작 본인은 고통을 인지하지 못하여 오히려 평온한 듯 보인다. 이쯤에서 필자의 근사체험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과거부터 심장에 경미한 부정맥이 있었는데 심장이 덜컹거린 후 잠시 멈추는 느낌이 올 때 기침을 하면 정상화되곤 했다. 2015년 4월24일 심방세동이라는 심각한 부정맥이 간헐적으로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고서야 정신을 차려서 건강을 최우선으로 신경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저녁 지진이 난 것처럼 수차례 가슴이 심하게 진동하더니 갑자기 딱 멈추는 것이었다. 기침을 해도 심장의 맥이 돌아오지 않았고 시야가 주변부에서 중앙으로 점점 검어지기 시작하더니 터널같이 보이다가 깜깜해지는 것이었다. 동시에 숨은 안 쉬어지면서 '이제 내가 죽는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짧은 순간 심장돌연사로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아직은 내가 때가 아닌데'라는 생각이 복합적으로 스쳐 지나가며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 보니 119구급차 안이었다. 심전도 모니터가 선명하게 보였는데 고맙게도 규칙적으로 잘 뛰고 있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죽은 줄만 알았던 내가 아직 살아 있구나'하는 안도감과 함께 '이렇게 해서 깨어나지 못하면 그게 바로 죽는 것이구나'였다. 그런데 잠시 체험한 죽음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내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진단은 빈맥 서맥 증후군으로 일시적으로 심정지시간이 길어져서 근사체험을 하게 되었고 얼마 후 빈맥을 시술받아 없애고 난 후 그런 증상은 깔끔하게 없어졌다. 내 환자들 중 심폐소생술로 다시 살아난 환자들에게 물어보면 일관된 답이 '기억이 없다. 깜깜하더라'고 하는데 필자가 체험한 당시 상태를 토대로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꿈을 꾸지 않은 깊은 잠의 상태'인 것 같다. 마치 우리가 신생아 때 기억을 못 하는 것처럼. 필자는 근사 체험을 통해 죽음은 누구에게나 부지불식간에 올 수 있다는 것과 질병을 통해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듯이 죽음의 성찰을 통해 삶의 귀함을 깨닫게 되는 게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나태주 시인의 '유언시' 한 구절처럼 '하루하루를 이 세상 첫날처럼 맞이하고 이 세상 마지막 날처럼 정리'하며 살아간다면 충만한 삶에 이어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곽동협 <운경의료재단 곽병원 원장, 영남일보. 2021년 10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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